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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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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5>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2 "가동歌童이 끊겨지지 않는 것은 전날 무동舞童의 남은 풍습에 인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를 폐지한다면 원묘原廟에서 송덕頌德하는 음音이나 공적으로 빈객을 연향宴享하는 악樂이 어찌 되겠습니까. 신의 망견으로는 가동은 폐지할 수 없으며 세종께서 무동은 혁파한 것은 오로지 계속하기 어려운 때문이라고 하였을 뿐이요 예가 아니기 때문에 없애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계속할 수 있어 오래 할 수 있는 대책을 얻게 되면 전의 법규를 수복修復하는 성주의 계술繼述하는 데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언필층 신의 망령된 의견이라고 자신을 낮추어 의견을 말하였다. 박연의 세종 때 이루지 못한 제도를 기어이 세워보겠다는 것이었다. 집념도 대단하지만 의지가 참으로 강하였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경외京外의 양인良人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람을 추쇄推刷하여 입속入屬하게 하면 잇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 가동의 임무는 반드시 용모 성음聲音 성품 생리生理로 골라야 하므로 사람 수가 많은 곳에서 무리를 모아놓고 간택揀擇하여야 하는데 무동을 처음 설치한 법에 의하여 가동을 세운다면 잇댈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다. 외방外方 각 고을에 숫자를 책임 지우고 경상도 66 전라도 56 충청도 53 총 175고을에서 3고을에 한 사람의 아이를 정하여 내게 한다면 58인이 될 것이며 경기도 41 황해도 25 강원도 23 총 87고을에서 5고을에 한 사람의 아이를 정하여 내게 한다면 17인이 될 것이니 합하면 75인이 되는데 이로써 액수를 정하고 경외에 장부를 비치하고 윤차輪次로 숫자를 충당하면 될 것이다. 대개 동기童伎를 바꾸어 세우는 기한이 7, 8년 뒤에 있으니 만약 세 고을에서 윤차로 한 사람의 아이를 세운다면 반드시 21, 2년이 걸려서 도로 처음 세운 고을로 돌아가고 다섯 고을에서 윤차로 한 사람의 아이를 세운다면 모름지기 38, 9년이 걸린 뒤에 처음 세운 고을에 돌아갈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바꾸어 대신하게 하는 기간이 매우 넉넉하여 동기의 숫자가 항상 찰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며 양인良人의 남편에게 시집 가서 낳은 사람이나 여기女妓 무녀巫女의 자식을 이에 더하면 가동을 잇댈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종 임금이 창립한 회례연會禮宴 양로연養老宴의 악樂이 자연히 옛날로 복구하여져 오늘날 거듭 새로워지고 길이 후세에 전하여져 일거에 만전萬全할 것이다. 먼 앞날을 내다보는 계책이었다. 대단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누가 있어 이렇게 주도면밀한 생각을 실현하는 묘책을 제시할 수 있을까. 예와 악의 분야 악의 분야, 그것도 그 하부 구조라고 할까 악과 관련한 세세한 분야에 이르기까지 소중하게 대처하는 그리고 너무나 전문적이고 자상한 방안이었다. 정말 박연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왕前王이 하지 못한 것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를 한번 시험하여 보소서.” 끈질기고 간곡한 박연의 상언은 계속되었다. 셋째 중국에서는 공공 연회에 여악女樂을 쓰지 않았고 태종 임금은 연향에 여악을 쓰지 말라고 하였고 세종 임금은 여러 대 내려오는 유풍遺風이기 때문에 가볍게 고치는 것을 무겁게 여겼으나 새 황제가 등극하고 마침 성주城主가 즉위하는 초기를 당하여 덕德을 새롭게 하는 바로 그러한 때에 구습舊習을 따라서 여악을 쓴다면 적의適宜한 바가 아니다. 넷째 악부樂部의 악에는 제향악祭享樂이 있고 연향악宴享樂이 있는데 제악祭樂은 봉상시奉常寺 십이궁보十二宮譜와 20여 장章이 있어서 이습肄習한 지가 오래이나 연악宴樂은 세종 임금이 주문공朱文公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중에서 아악시장雅樂詩章 12편의 악보를 얻어 표제表題하여 내었고 보법譜法이 크게 갖추어졌으며 그 중에서 성음聲音이 아름다운 것을 골라 회례연 양로연으로 들이었으며 보법 전체를 주자소鑄字所에 명하여 인출印出하도록 전한 지 지금까지 21년이나 아직도 인행印行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보법을 한 번 잃으면 이미 퍼진 금석金石의 음音도 소종래所從來를 알지 못할 것이니 융안지보隆安之譜가 어려魚麗 제4장에서 나오고 서안지보舒安之譜가 황황자화皇皇者華 제2장에서 나오고 휴안지보休安之譜가 남산유대南山有臺 제3장에 나오고 수보록受寶籙이 녹명鹿鳴 제1장에서 나온 것과 같은 사실을 후세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원컨대 전하께서 거듭 인행하도록 명하고 미루어 두지 말도록 한다면 심히 다행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박연의 상언을 의정부에 내려서 영의정 하연河演 우의정 남지南智 좌찬성 김종서金宗瑞 등이 의논한 결과 모두 그대로 따르고 여악을 사용하는 것은 우선 구습舊習을 따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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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0흙의 소리 이 동 희 아악雅樂 <1> 세종 15년(1433) 1월 1일 정조正朝에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갔고 이에 회례연會禮宴을 의식에 따라 베풀었다. 이날, 설날 아침 문무백관이 모여 임금에게 배례한 뒤에 베풀어진 연회는 아주 특별하였다. 아악雅樂이 처음으로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박연이 주도하여 개혁하고 새로 완성한 문묘제례악을 이날 처음으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아악은 좁은 뜻으로는 문묘제례악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궁중 밖의 민속악에 대하여 궁중 안의 의식에 쓰던 당악 향악 아악 등을 총칭하는 음악이다. 정아正雅한 음악이란 뜻이다.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궁중의 제사 음악으로 발전하여 변개變改를 거듭하다가 송宋나라 대성부大晟府에서 대성아악大晟雅樂 대성악으로 편곡 반포함으로써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고려 예종 11년에 송나라 휘종徽宗이 대성아악과 여기에 쓰일 등가登歌 헌가軒架에 딸린 아악기 일습과 아악에 수반되는 문무文舞 무무武舞 등 일무佾舞에 쓰이는 약籥 적翟 간干 과戈 36벌과 이러한 의식에 쓰이는 의관衣冠 무의舞衣 악복樂服 의물儀物 등을 모두 갖추어 보냄으로써 이땅의 아악의 역사기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대성아악은 원구圓丘 사직社稷 태묘太廟 선농先農 선잠先蠶 문선왕묘文宣王廟 등의 제사와 그 밖에 궁중의 연향宴享에 광범위하게 쓰이게 되었다. 약은 피리이며 적은 꿩의 깃을 묶어 무악에서 손에 쥐는 물건이고 간은 창이고 과는 방패인데 각종 악樂을 행할 때 문무는 약적을 무무는 간척을 잡게 하여 배열을 편성한다. 문성왕은 누구인가. 앞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공자孔子를 그렇게 부른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내린 시호諡號이다. 왕王과 성聖의 위상을 생각해 본다. 문文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문묘文廟는 공자를 모신 사당을 말하며 성묘聖廟 근궁芹宮이라고도 한다. 미나리 궁(집)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좌우간 고려 말에는 악공을 명明나라에 유학 보내고 악기를 들여와 명나라의 아악을 종묘 문묘 조회朝會 등에 쓰게 하였고 공양왕 때는 아악서雅樂署를 설치하여 종묘의 악가樂歌를 가르치고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아악을 그대로 계승하였지만 세종 때에 와서 크게 정리되었다. 대개혁을 하여 새 출발을 한 것이다. 한국 아악은 중국에서 유래한 의례음악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세종에 의하여 창제된 것이었다. 근자에(2010) 출간된 『아악 혁명과 문화 영웅 세종』(한홍섭)에서 한국 아악이 세종에 의하여 신악新樂으로 창제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와 함께 문화적 자주국이라는 꿈을 이루고자 했던 세종식 문화대혁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종은 기존의 중국 아악 대신 한국의 새로운 아악으로 국가의례를 거행하고자 했으며 그로 인해 완성된 신악이 우리 조선 아악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아악이 아니고 우리의 아악을 사용하여 국가의례를 거행한 것이다. 세종은 박연으로 하여금 궁중 아악을 정비하게 하면서 악장樂章 악보樂譜 악기樂器를 일일이 흠정欽定하였고 모든 음악의 기틀이 되는 대대적 사업을 벌였던 것이다. 흠정은 왕이 친히 제도나 법률 등을 제정하는 일을 말한다. 악리樂理학자 박연은 12율관律管과 편경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조하였고 아악을 고려나 송나라의 대성악을 뛰어넘어 주나라 것에 가까운 아악으로 재정립 복원하여 음악의 새 기틀을 확립하였다. 새로운 토대 위에 음악 이론 환경 제도를 개혁하고 새 뿌리를 내리게 하고 꽃을 피운 것이다. 제악制樂의 임무를 전관專管하게 된 박연은 악기를 제작하고 조회 제사 등의 아악보雅樂譜를 발간함으로써 아악이 공식 의례음악으로 자리를 굳히게 하였던 것이다. 조선 건국 초 혼란이 안정되어 문물의 정비에 힘을 기울이는 가운데 아악을 독자적으로 복원하여 그 용도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던 것이고 아악의 융성은 극에 달하였던 것이다. 그 중심에 박연이 있었던 것이다. 줄기찬 상언과 악기의 제조 불굴의 의지는 개혁의 견인차가 되었다. 신악이 완성된 후 그 첫 의례는 새 역사의 시작이었다. 하나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중국의 아악이 아닌 우리의 독자적인 아악을 사용하려는 자주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국의 한문이 있음에도 우리의 말 글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고 중국의 음악을 기보記譜하는 악보가 널리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고유의 음악을 기보할 수 있도록 따로 동아시아 최초의 유량악보有量樂譜인 정간보井間譜를 창제하였듯이 우리 문화의 자주적 혁명이었던 것이다. "그래 바로 이것이야!” 박연은 세종 임금의 쾌재를 누구보다 먼저 공감하며 속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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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8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현재까지 일본의 전통음악인 가가쿠(雅樂)로 전승되고 있는 고구려 음악인 고마가쿠(高麗樂)는 848년에 일본의 왕립음악기관인 가가쿠료(雅樂寮)의 악제개혁(樂制改革) 때 백제음악인 구다라가쿠(百濟樂)와 신라음악인 시라기가쿠(新羅樂)를 통폐합시켜 가가쿠료의 오른쪽인 우방(右坊)에 배치하였다. 좌방(左坊)에는 당나라 음악인 도가쿠(唐樂)를 배치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고마가쿠는 우방악으로 도가쿠는 좌방악이라고도 부른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음악가들의 활약상을 조금 더 짚어보도록 하자. 570년에 일본에서 고구려 사신이 머물던 고려관(高麗館), 또는 일명 상락관(相樂館)이 완성됐을 당시 고구려 음악인 고마가쿠가 상락관에서 연주되었다. 701년 왕립음악기관인 가가쿠료의 직원령(職員令)에 의하면 당시에 고구려의 고려악사(高麗樂師)는 4명이었고, 그 문하생인 고려악생(高麗樂生)은 20명이었다. 고려악사 4명은 횡적(橫笛; 가로부는 피리) · 군후((고구려 거문고)는 연주되지 않았고, 그 대신에 고(鼓)가 추가되어 고마가쿠에서 연주되었다. 고마가쿠의 횡적은 현행 고마부에(高麗笛; 고려적)로 전승되었고, 막목은 현행 히치리키(觱篥; 피리)로 전승됐으며 고(鼓)는 현행 산노쓰즈미(三の鼓)로 전승되고 있다. 고마부에는 가로로 부는 피리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대금과 같이 옆으로 부는 악기이다. 한 개의 취구와 6개의 지공이 있고 길이는 37cm 지름은 9mm 정도로 우리나라 대금보다는 작은 악기이다. 막목은 일본에서는 히치리키라고 부르는데 한반도에서 넘어간 악기로 현재 우리나라의 당피리와 비슷하다. 악기의 길이는 약 18cm 정도이다. 산노쓰즈미는 우리나라의 장구의 형태처럼 허리가 잘록하고, 길이가 20cm 정도로 장구에 비하면 아주 작은 편이다. 음악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당시 음악의 악조(樂調) 체계는 어떠했을까? 고구려, 백제, 신라는 악기만 일본에 전한 것이 아니었다. 음악의 체계까지 전해지면서 일본 음악의 이론이 정립될 수 있도록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악조의 이름에서 알 수가 있다. 현행 일본의 아악인 가가쿠의 고마가쿠에서 사용되는 악조(樂調)는 세 가지이다. 박일월조(狛壹越調)라고 부르는 고려일월조(高麗壹越調)와 박평조(狛平調)라고 부르는 고려평조(高麗平調), 박쌍조(狛雙調)라고 부르는 고려쌍조(高麗雙調) 등, 세 가지이다. 박일월조와 고려일월조는 일본말로 고마 이치고쓰조(狛壹越調 또는 高麗壹越調)이고, 박평조와 고려평조는 고마 소조(狛平調 또는 高麗平調)이며, 박쌍조와 고려쌍조는 고마 효조(狛雙調 또는 高麗雙調)라고 부른다. 세 악조의 기본음의 음고(키)는 고마가쿠는 D키이고 도가쿠는 C키로 고마가쿠가 당나라 음악인 도가쿠보다 음정이 장2도가 높다. 세 가지 악조로 공연되는 곡을 살펴보면 고려 평조로 된 고마가쿠의 무악곡(舞樂曲, Bugaku)은 임가(林歌, Ringa)에만 해당된다. 고려쌍조의 무악곡은 백빈(白濱, Hakuhin) · 소지마리(蘇志磨利, Soshimari) · 지구(地久, Chikyū) · 등천락(登天樂: Tōtenraku)에 해당되며, 고려일월조의 무악곡은 감취악(酣醉樂, Kansuiraku) · 고려용(高麗龍: Komaryū) · 곤륜팔선(崑崙八仙, Konron Hassen) · 귀덕후(歸德侯, Kitokugo) · 길간(桔桿, Kikkan) · 납소리(納蘇利, Nasori) · 박모(狛鉾, Komaboko) · 신말갈(新靺鞨, Shinmaka) · 신조소(新鳥蘇, Shintoriso) · 인화락(仁和樂: Ninnaraku)·장보락(長保樂: Chōbōraku) · 진숙덕(進宿德, Shinshukutoku) · 퇴숙덕(退宿德, Tsishukutoku) · 호접악(胡蝶樂, Kochōraku) 등이 해당된다. 현재 일본 가가쿠에서 공연되고 있다. 일본 전통음악은 고대부터 19세기 중반인 에도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고구려 음악인 고마가쿠의 영향 아래에서 발전을 계속 거듭하였다. 가가쿠라는 이름으로 많은 악기들이 변형되고, 새로이 만들어지면서 현재까지도 전통음악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민속음악인 속악(俗樂)도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일본의 대중음악은 19세기 후반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는 일본의 전통 민속음악과 함께 속악(俗樂)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에도시대를 지나 메이지 시대(1868~1912)를 열면서 일본은 대중음악의 태동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까지는 일본의 대중가요를 지칭하는 소위 엔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서양문물이 유입되면서 간접적으로 서양음악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한국도 1870년경부터 서양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한국의 서양음악 유입은 일본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본다. 지난 2회에 걸쳐 삼국시대에 전수한 일본 전통음악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다음 회에서는 트로트 뽕짝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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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7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뽕짝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음악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사실의 토대는 일본근대음악과 엔카와 뽕짝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일본을 알아야 한다’ 이일영 글, ‘한겨레음악대사전’ 송방송 저 참조). 고대에서 근대까지의 일본음악은 우리나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음악적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역사를 찾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본다. 고대 일본은 문화적 빈국으로 우리나라로부터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8세기 일본 나라시대(奈良時代) 때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전해진다. 서기 453년 일본의 19대 인교 천황(允恭天皇)의 장례식에 신라 제19대 눌지왕(訥祗王, ?~458)이 악공 80여 명과 여러 악기를 보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는 이를 바쳤다고 왜곡하고 있다. 554년에는 일본 궁중에 백제 음악인이 와 있었는데 이 사람들과 교체하기 위하여 백제 성왕(523~554) 시대 팔품의 관직을 가진 삼근(三斤)이라는 음악인을 파견하여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554년 이전에 이미 백제의 여러 음악인이 일본 궁중에서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다. 당시 일본에는 궁중 연희를 치를 만한 음악인과 악기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백제 무왕(600~640) 시대에는 예인(藝人) 미마지(味摩之)가 612년에 기악무(伎樂舞)를 일본에 전했고, 이는 일본의 전통 가면극 기가쿠(伎樂)의 형성에 기여했다. 미마지는 일본 사쿠라이 마을에서 소년들을 모아 기가쿠를 가르쳤다는 내용도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고구려 음악이 일본에 전해진 기록은 684년 제40대 천황(天武天皇?~686) 때이다. 기록에는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高麗樂)가 전해졌다고 하는데, 고마가쿠는 일본의 궁중음악 가가쿠(雅樂) 중 신소우도쿠(進走禿:가면춤의 일종) 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악기를 사용하였지만, 일본에 서로 다른 음악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은 서로 다른 독자적인 음악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우리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인 사실을 부인하며 역사 왜곡을 일삼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이란 4세기 중엽에 한반도의 가야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현재는 학설로서의 생명력을 거의 잃었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음악을 전해 받은 일본은 현재까지도 임나일본부설을 교과서에 실어 교육을 하고 있다. 일본에는 중국의 수나라(581~630)와 당나라(618~907)의 음악 도가쿠(唐樂)도 전해졌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高麗樂)가 도가쿠보다 먼저 일본에 전해졌음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고마가쿠는 848년 일본의 왕립음악기관인 가가쿠료(雅樂寮)의 악제개혁(樂制改革) 때 백제음악 구다라가쿠와 신라음악 시라기가쿠를 통폐합시켜 가가쿠료의 오른쪽 우방(右坊)에 배치했다. 좌방(左坊)에는 당나라 음악 도가쿠(唐樂)를 배치했고,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는 당나라 음악 도가쿠와 함께 일본 가가쿠(雅樂)의 양대산맥으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일본은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의 바탕으로 전통춤과 전통가요도 형성된다. 무용과 노래가 함께 어우러진 음악 쿠니부리노 우타마이(国風歌舞)와 일본의 가요 우타이모노(謡物)가 있다. 일본의 전통 궁중음악 가가쿠(雅樂)의 도가쿠(唐樂)와 고마가쿠(高麗樂)는 관현악 중심의 실내음악이다. 무용 음악은 부가쿠(舞楽), 기악 합주의 독립된 음악은 칸겐(管弦)이라 부른다. 그밖에 다양한 종류의 민간 속악(俗樂)을 호가쿠(邦樂)로 분류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 민속음악인 호가쿠를 속악으로 부르고 있다.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가 일본에 끼치는 영향은 19세기 중반인 에도막부 마지막 시대(1603~1868)까지 계속 이어진다. 다음 회는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의 영향으로 발전을 이룬, 일본 전통음악에 대해 조금 더 소개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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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42흙의 소리 이 동 희 절정 <5> 그것은 왕이었다. 임금이었다. 맹사성이 늘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시로 읊은 것-역군은 이샷다-처럼 임금의 은혜였다. 은혜래도 좋고 그런 뜨겁고 크나큰 바위와 같이 불덩이와 같이 햇살과 같이 그를 누르는 어떤 힘이었다. 빛과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기보다 누리고 베푸는 것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일을 하고 몸을 바수는 것이었다. 자신을 다 쏟아붓는 희열이었다. 어떤 대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계산에서 다른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하고 수고하는 즐거움이었다. 그것을 받아주고 인정하여 주는 보람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그는 능동적으로 결행을 하고 책임도 그가 졌다. 세자 시강원 문학으로 임하면서 가르치고 타이른 대로 스스로 행하고 실천하여 본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뿌듯하고 값진 일인가. 아름다운 일인가. 그 자리같이 함께 있지 않을 때도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할 때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하고 해찰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나라에 관직을 맡고 있어 무슨 일을 하든 어느 곳에 가 있든 늘 하늘이 내린 하늘 같은 임금을 생각하였다. 그가 문학으로 있으면서 무엇을 가르쳐서가 아니었다. 백성으로서 신하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이며 임무라고 여겼던 것이다. 어버이를 하늘같이 스승을 하늘같이 모시고 받들어야 한다고 어려서부터 배우고 몸에 배어있는데 그렇게 실행하였었는데 이제 부모가 되고 스승이 된 그는 스스로 행하는 것이었다. 의영고義盈庫 부사副使 사재부정司宰副正 노중례盧重禮 교수를 거쳐 봉상판관奉常判官 겸 악학별좌樂學別座에 제수除授되는 등 여러 일을 맡아 하였는데 어디서 무얼 하든 직무에 매달려 퇴청할 줄 모르고 끼니를 거르며 밤을 새우기를 밥 먹듯이 하여 끊임없이 새 정책을 입안하고 발의를 하였던 것이다. 박연이 쉰이 되던 해 세종 9년(14237) 석경石磬을 만들었고 다음 해 편경編磬과 특경特磬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53세 때는 그동안 정신없이 밀어붙이던 개혁의 상주는 봇물이 터지듯 마구 쏟아졌다. 2월에 향사享祀 때 악율을 바로잡으라는 글을 올리고 3월에 아악의 음절을 조정하라는 글을 올렸다. 7월에 봉상 소윤으로 아악에 향악을 쓰지 말라는 글을 올렸다. 9월에 헌가를 고제대로 만들라는 글 11월에 조회악공은 공사비자公私婢子로 충당하라는 글, 12월에 조회악을 조정하라는 글, 악현樂懸을 고제대로 만들라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토고土鼓를 만들라는 글, 당상악堂上樂에 부拊를 쓰라는 글, 대고大鼓를 만들라는 글, 토부土缶를 구어 만들라는 글, 뇌고雷鼓 영고靈鼓의 제도를 바꾸라는 글, 편종編鐘을 갖추어 만들라는 글, 종경鍾磬을 교정하라는 글, 죽독竹牘을 고쳐 만들라는 글, 궤제机制를 고치라는 글, 석경石磬을 만들기 전에는 아직 와경瓦磬을 쓰도록 하라는 글, 생호笙瓠를 본제대로 만들라는 글들을 올렸다. 얘기가 더러 중복되지만 도무지 숨이 가쁘다. 밤중에 고불 대감을 찾아가서 의논하기도 했던 대로 무무武舞에는 형관을 쓰지 말라는 글, 일무佾舞는 고제대로 하라는 글도 올렸다. 예악 전반에 관한 정책 제도 그리고 악기 하나하나의 운영 관리 체계를 과감하게 고치고 유지하고 모든 영역 부분 부분을 샅샅이 세밀하게 점검하고 주물렀다. 악공들의 복식을 갖추라는 글도 올렸다. 여러 제소祭所마다 각기 창고 하나씩을 세우라는 글, 제향악祭享樂을 갖추라는 글, 제사 때 쓰는 율관律管을 지으라는 글을 올리고 재랑齋郞과 공인工人을 엄히 다스리라는 글, 악부樂部마다 음악을 교정하라는 글, 화악華樂에도 아조我朝의 가곡을 쓰라는 글을 올렸다.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헌가軒架를 고제대로 하라는 글, 조회악에 악공을 예습시키라는 글, 좌전坐殿 때 풍류를 시종 갖추라는 글, 조회악과 당상당하의 조하朝賀 때 헌가만을 쓰라는 글, 조회악에 월율月律을 쓰라는 글, 악가樂架를 예비하라는 글, 악감조색樂監造色을 설치하라는 글들도 올렸다. 스스로도 정신이 없었다. 허둥지둥하였지만 어느 하나 잘못 올린 것은 없었다. 모르고 빠뜨린 것은 있어도 알고서 올리지 않은 것은 없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이 닿는 데까지 젖 먹던 힘 사력을 다하였다. 그해는 한 달이 더 있었다. 윤閏 12월에는 또 아악보雅樂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판서判書에서 이조吏曹판서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또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였다. 너무 숨이 찼다. 이듬해 정월에는 왕으로부터 안마鞍馬가 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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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21흙의 소리 이 동 희 소명召命 <1> 때가 이른 것이다. 새로운 예악 정책이 시작되었고 박연의 상소가 계기가 되었다. 같은 무렵 같은 생각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세종조 초기부터 예악 특히 악의 정립에 나섰다. 태종 6년(1406)에 설치하였던 악학樂學을 재가동시킨 것이다. 고려 말 유학 무학武學 음양학 의학 등 십학十學의 하나로 설치된 기관으로 음악에 관한 옛 문서들을 고찰하여 음악 이론과 역사 등 악서樂書를 편찬하고 악공들의 의례, 악기 제작, 악공 선발 등의 일을 하는 기관이었다. 예문관 대제학 맹사성孟思誠 유사눌柳思訥 등을 제조提調로 삼고 박연을 악학 별좌別坐에 임명 실무 책임을 맡겼다. 제조는 겸직이었고 별좌는 정5품 종5품의 별 보잘 것이 없는 자리였지만 박연은 어떤 직에 있을 때나 변함이 없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혼신의 힘을 다 하였다. 특히 무엇보다 예악 분야의 직을 맡고부터는 그것을 천직으로 알고 불철주야 용맹 정진하였다. 저녁에도 밤늦도록 직무에 관련된 책을 읽고 공부를 하였다. 집현전 서고에서 밤을 새기도 하였다. 서생 때와는 달리 무슨 책이든 어떤 시간에든 전적을 볼 수 있었다. 식음을 폐할 때도 많았다. 언젠가부터 서울 살림을 하였고 아이도 너 댓명 되었지만 박연은 늘 서생이었다. "어떻게 갈수록 더 힘드신 것 같애요.” 며칠 집에도 안 들어가자 아내 송씨가 걱정스레 말하는 것이었다. "미안하오.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소.” 박연은 허리까지 굽히며 참으로 송구한 낯빛을 하였다. 그러자 셋째 아들 계우季愚가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도 그러냐고 묻는다. "그럼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고 어려운 것이 너무 많구나.” 박연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뒷날 그에게 많은 기쁨을 안겨주기도 하고 단종의 편에 썼다가 처형되며 엄청난 고초를 겪게도 하였다. 너무 잘 하려고 하다가 그런 게 아니냐고 아내가 다시 말하자 이번에는 으음하고 큰기침을 하는 것으로 분위기를 제압하였다. 일은 갈수록 많아졌고 힘들어졌다. 아내의 말대로 정말 너무 잘 하려고 하고 자청하여 일을 만들어서였다. 그가 강설講說한 것이었고 그의 분야였다. 평소 그가 탐구하고 연마한 영역이었다. 아니 그가 해야만 되는 일이었고 이루어야 하는 일이었다. 예 그리고 악은 하늘의 명령이고 땅의 명령인 것 같았다. 그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고 힘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 것이었다. 박연은 다시 왕에게 청하였다. 더욱 과감하였다. 세종실록 27권 세종 7년 2월 24일 갑자에, 예조禮曹에서 악학별좌 박연의 수본手本에 의거하여 계啓하기를… 의 기사를 보자. 음악의 격조가 경전 사기 등에 산재하여 있어서 자세히 고찰하여 보기가 어렵고 또 문헌통고文獻通考 진씨악서陳氏樂書 두씨통전杜氏通典 주례악서周禮樂書 등을 사장私藏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비록 뜻을 든 선비가 있더라도 얻어보기가 어려우니 진실로 악율樂律이 이내 폐절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문신 1인을 본 악학에 더 설정하여 악서를 찬집하게 하고 또 향악鄕樂 당악唐樂 아악雅樂의 율조를 상고하여 악기와 악보법을 그리고 써서 책을 만들어 한 질秩은 대내大內로 들여가고 본조本曹와 봉상시奉常寺와 악학관습도감樂學慣習都監과 아악서雅樂署에도 각기 1질씩 수장하도록 하소서 계는 진계陳啓의 뜻으로 임금에게 상주上奏하는 것이다. 대내는 대전大殿을 말하고 본조는 예조, 봉상시는 국가의 제사 시호諡號를 의론하여 정하는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박연의 청은 즉각 받아들여졌고 그대로 따랐다. 그는 다시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악기의 세밀한 음율 체계에 대한 청원을 하였다. 이제 봉상시에 있는 중국에서 보낸 악기 가운데, 소관簫管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곧 악기도설樂器圖說에서 소관이라 이르는 제도이니, 황종黃鍾의 한 음성을 고르게 한 것에 족한 것인데, 이를 팔척관八尺管이라고도 하며 혹은 수적垂篴이라고도 하고 중관中管이라고도 하며 궁현宮懸에서 사용합니다. 민간에서는 소관小管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음율의 소리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봉상시에서는 과거부터 헌가軒架에 적이 있었기 때문에 소관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헌가에 사용한 적은 봉상시 서례도序例圖에 주례도周禮圖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적은 옛적에는 구명이 넷이었으나 경방京房이 한 구멍을 더 내어 오음五音을 갖추었는데 오늘에 사용하는 저笛가 곧 이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양과 제도가 비록 수적竪笛과 비슷하나 음율에 있어서 응종應鍾과 무역無射의 소리가 부족하오니 헌가에 사용하기는 부족합니다. 바라옵건대 헌가에 종래에 쓰던 저를 버리고 중국에서 보내온 소관을 사용하여 음악의 소리를 조화 시키소서 이것은 세종실록 31권 8년 1월 10일 을사의 기록이다. 이 역시 그대로 시행되었다. 소관은 대금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황종은 동양 음악에서 십이율의 첫째 음이고 응종은 열두 번째 음, 무역은 열한 번째 음이다. 헌가는 대례나 대제 때에 연주하는 아악 편성으로 종고鍾鼓를 틀에 걸어놓고 관악기와 현악기에 맞추어서 치는 것이다. 저와 적은 피리이고. 너무도 전문적이며 해박하고 치밀한 음율에 대한 견해여서 어느 누가 거기에 토를 달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왕의 믿음이 두터웠다. 절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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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12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6> 아雅는 궁궐에서 연주되는 궁중음악 곡조에 붙인 가사歌詞이다. 시이다. 「시경」에 소아小雅 74편 대아大雅 31편의 시가 전하고 있다. 궁정의 연회와 전례 때의 의식 시이다. 이들 시의 내용은 주周나라 개국을 칭송하고 선왕宣王을 영송詠頌하는 것 등 다양하다. 역사시 서사시가 많다. 순정純正한 것을 대아, 풍이 섞인 것을 소아라고도 하였다. 아는 바로잡음의 뜻을 가지고 있고 정正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는 조정 정악正樂의 노랫말이다. 풍風은 국풍國風이라고도 하며 송頌은 종묘 제례 때에 연주하던 악가樂歌의 시이고, 풍 아 송에 부賦 비比 흥興을 더하여 육의六義라 하는데 시를 짓는 여섯 가지 범주이다. 부는 신神의 말을 전하거나 신을 찬양할 때 쓰는 표현법이며 비는 비유법, 흥은 신명께 고하는 수사법이다. (詩有六義焉 一曰風 二曰賦 三曰比 四曰興 五曰雅 六曰頌 「시경」대서大序에 써 있다.) 또한 풍 아 송은 시가의 목적에 따른 체재상의 분류로서 시의 삼경三經이라 하며 부 비 흥은 표현법상 수사의 차이에 따른 분류로서 시의 삼위三緯라 한다. 시의 씨줄 날줄이다. 공자는 만년에 제자를 가르치는 데 있어 육경六經 중에서 시를 첫머리로 삼았다. 시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정에서 우러난 것이므로 정서를 순화하고 다양한 사물을 인식하는 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라고 말하였다. 그가 정리한 시경의 시 삼백여 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고 하였다. 전혀 거짓됨이 없고 순수하다는 말이다. 20세때 태어난 아들 백어伯魚에게도 「시경」공부를 권하였다.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공부하지 않으면 마치 담벼락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지.” 학관이 곁들였다. 고대 제왕들은 먼 지방까지 채시관採詩官을 파견해 거리에 나돌고 있는 노래며 가사들을 모아 민심의 동향을 알아보고 정치에 참고로 삼았다고 하며, 조정의 악관樂官에게 이 시에 곡조를 붙이게 하여 다시 유행시킴으로써 민심의 순화에 힘썼다. 그런 말도 하였다. 학관은 제술을 하고 있는 박연에게 편히 앉으라고 하였다.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신호였다. 시에 대하여 말하였으니 아악에 대하여 논술해야 하는 것이다. "예 그러겠습니다.” 박연은 더욱 꼿꼿하게 앉으며 입론을 펼쳤다. 아악은 궁중의 정아正雅한 음악이다. 궁중 밖의 민속악에 대하여 궁중 안의 의식으로 쓰던 음악 아부악雅部樂 향부악鄕部樂 당부악唐部樂을 말한다. 그 중 아부악만을 아악이라고 하기도 한다.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 같은 것이다. 향부악과 당부악은 우방右坊, 아부악은 좌방左坊에 속하였다. 아부악을 더 우위에 두었던 것이다. 아악은 중국의 주나라 때부터 궁중의 제례 음악으로 발전하여 고려 때(예종 11, 1116년)에 송宋나라에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이 전해지면서 비롯되었다. 그 전에도 태묘太廟(역대 제왕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종묘宗廟) 등의 제례에서 음악을 사용하였지만 대성아악은 원구圜丘 사직社稷 선농先農 선잠先蠶 문선왕묘文宣王廟(공자 묘) 등의 제사와 그 밖에 궁중의 연향宴享에 쓰이었다. 고려 말에는 악공樂工을 명나라에 유학보내고 악기를 들여와 명나라의 아악을 종묘 문묘 조회朝會 등에 쓰게 하였고 공양왕 때는 아악서雅樂署를 설치하여 종묘의 악가樂歌를 가르치고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아악의 정의와 유래 등을 말하고 현황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아악과 제례, 악현 악곡 등에 대하여 순서대로 말하고는 소견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다른 학문들에 비하여 음악 아악의 분야는 발전이 없고 중국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답습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것을 다시 물려받은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 고려조와 조선조가 서로 다르고 시대가 달라졌는데 변화가 없고 연구가 없고…” "그런 것 같은가?” 학관은 그의 말을 가로채며 그러면 다음 시간에 무엇을 개선하고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그 방안을 연구해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박연이 난감한 얼굴로 학관을 바라보자 웃으면서 다시 말하는 것이었다. "시경을 더 읽어 보시게. 답이 나올걸세.” 써지지 않으면 계속 읽으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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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이란?국악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한국음악·한국전통음악·한민족음악을 지칭한다 국악은 아악(雅樂)·당악(唐樂)·속악(俗樂)을 모두 포함하며, 일반적으로 전통음악과 최근의 한국적 창작음악까지를 포함하는 우리나라 음악이다. 고려 때 송나라에서 아악이 수입된 이후 당시의 음악은 아악과 이미 그 이전에 들어와 있던 당악 및 우리 고유의 음악인 속악 곧 향악의 세 가지로 구별되었다. 아악은 주로 제사에 쓰였고, 당악은 주로 조회(朝會)와 연향(宴饗)에 쓰였으며, 향악은 민간에서 우리말로 익히는 것 등으로 되어 있었다. 역대의 이 모든 음악은 장악원(掌樂院)이라는 음악기관에서 관장하였는데, 1908년 12월 27일 포달(布達:궁내부에서 일반에게 널리 펴 알리는 통지) 제161호로 궁내부(宮內府)의 관제가 개정, 반포될 때 장악원의 기구가 대폭 축소되어 궁내부 장례원(掌禮院)에 부속되었고, 악사(樂事)를 책임지는 상위직의 직계로 국악사장(國樂師長) 한 사람이 있었다. 이때에는 이미 양악(洋樂)의 군악대가 해산된 뒤여서 이를 그대로 궁내부에 흡수하여 각종 신식 의전과 빈객 접대에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양악대의 악장인 양악사장(洋樂師長)과 구별하기 위해 우리 전통음악을 관장하는 국악사장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비록 직명에서이지만 국악이라는 이름이 공공연하게 사용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광복 직후 재야의 국악인들은 이전의 아악사장(雅樂師長) 함화진(咸和鎭)을 중심으로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을 결성하였다. 이 대한국악원의 명칭에서 국악이라는 말이 다시 사용되었다. 또, 1950년 1월 16일 국립국악원의 직제 공포로 구 왕궁아악부는 국립국악원으로 개칭되어 국악이라는 말이 확립되었다. 아악이라는 말은 재래의 궁정음악 일부에 국한되지만, 국악은 아악과 민간에 산재한 민속음악 일체를 포괄할 수 있다. 국악은 현재 한국전통음악(韓國傳統音樂)과 한민족음악 등 다양한 용어로도 통용되고 있는데, 그 용어들은 범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국전통음악은 전통적으로 전승된 한국음악이며, 한민족음악은 우리민족의 생활 속에서 계승 발전된 음악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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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 박헌봉(朴憲鳳/1907~1977)해방 이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국악이론가. 경상남도 산청 출신. 1921년에 상경하여 한성강습소(漢城講習所) 보통과를 거쳐 1923년에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 고등과 3부를 졸업함. 1924년진주(晋州)에서 김덕천(金德天)·임한수(林漢洙)에게 2년간 가야금풍류(伽倻琴風流)·가야 금병창(伽倻琴倂唱)·고법(鼓法) 등 전통음악을 공부하고, 1934년에 진주음률연구회(晋州音律硏究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있으면서 풍류와 민속악을 연구함. 1936년에 상경하여 정악견습소(正樂見習所)에서 정악을, 아악부(雅樂部)에서 아악풍류(雅樂風流)를 연구하였고, 1938년에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근무하며 2년간 전통음악을, 조선가무연구회(朝鮮歌舞硏究會)에서 경서도(京西道) 가무를 연구함. 1941년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산하에 조선악부(朝鮮樂部)를 창설하고 상무이사로 취임하여 공연과 교육활동에 종사. 1945년 광복이 되자 국악건설본부(國樂建設本部)를 창설하고 부위원장으로 취임하여 국악의 부흥과 계몽에 힘썼음. 1947년에 구왕궁아악부 대표 겸 이사장으로, 1948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및 시공관운영위원(市公館運營委員), 문교부 예술위원으로 취임하였음. 1956년에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을 창설하고 원장 겸 이사장에 취임하여 국악 진흥에 힘썼으며, 1960년에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63년에는 국립극장운영위원 및 한국국악협회(韓國國樂協會)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韓國藝術文化團體總聯合會) 부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64년 문화재위원회(文化財委員會)의 위원을 역임하였음. 국악, 특히 민속악의 부흥과 교육에 공헌하여 1963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저서로는 『창악대강(唱樂大綱)』 등이 있다. 이를 기려 ‘기산국악제전’ 전국국악경연대회가 13회 개최되었음. 9월 12일 제14회가 개최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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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방일영국악상 송방송“우리 음악 뿌리찾기 60년… 이젠 살맛 납니다”유신(維新) 말기였던 1977년 캐나다 맥길대 음대 교수로 있던 그는 단호했다. “돌아가겠어, 조국으로.” 교수도 아닌, 국립국악원장이란 공직으로 귀국을 결정했을 때 주위에선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혀를 찼다. 김포공항을 빠져나올 때 그가 보물처럼 가슴팍에 품었던 건 국악용어를 빼곡히 채워넣은 낱말 카드 수백 장. “이걸로 우리 음악의 용어사전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 ‘한국음악학’은 그가 “아내도, 자녀도 한쪽으로 밀쳐둔 채 모든 걸 바친 인생 최대의 과제”였다. 제25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인 송방송(76)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얘기다.방일영국악상이 음악이론 학자에게 주어진 것은 만당 이혜구(2회), 이보형(16회)에 이어 세 번째다. 송방송은 1960년대 말 국악계 인사로서는 드물게 선진 음악학의 정수(精髓)를 배워 국내 음악학의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국립국악원장, 문화재 전문위원, 한예종 교수를 지내며 우리 음악의 뿌리를 집대성한 산증인으로 꼽힌다. 1991년 펴낸 저서 ‘조선왕조실록 음악기사 총색인’은 후배 연구자들에게 든든한 발판이 됐다. 조선 세종 때 궁중음악 연주를 담당했던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의 체제와 사회적 신분을 살피고 악공·악생들의 봉록 제도 등을 고찰했다.하회탈 펜던트를 목에 건 송방송 교수는 “살면서 가장 잘한 결정은 자동차도, 스마트폰도 없이 국악이론 연구에만 매달린 한심한 남편을 뒷바라지한 아내와의 결혼”이라고 말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1942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그는 배재고 시절 성악가(바리톤)를 꿈꿨지만 입시 석 달을 앞두고 국악과로 진로를 바꿨다. 당시 서울대 성악과 김학상 교수가 국악을 공부하면 박사가 될 수 있고, 교수도 되어 우리 음악을 맘껏 연구할 수 있다고 권유한 덕이다. 황병기 선생에게서 가야금을 배워 서울대 국악과에 입학한 그는 이혜구·장사훈 선생에게서 국악이론을 사사했다. 규장각의 ‘악장등록’ 같은 문헌들, 국립국악원의 고악보를 필사하며 학업에 전념했다. 논문을 읽을수록 “기본적인 국악 용어조차 제대로 정리한 사전이 없다”는 걸 절감했다. “서양의 음악학 체계를 보고 배워 우리 음악을 우리 식대로 정리해보겠다는 포부”로 캐나다 토론토대를 거쳐 1975년 미국 웨슬레얀대에서 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명문 맥길대를 떠나 월급 14만원인 국립국악원 원장으로 온 건 모두를 놀라게 한 행보였다. 초등학생 아들에게 180원짜리 짜장면을 사줄 수도,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250원짜리 국밥을 사 먹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좋았어요.”1980년 영남대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오전 7시 30분이면 그의 연구실 형광등은 어김없이 불을 밝혔다. 1984년 ‘한국음악통사’를 발간하면서 “우리 음악의 특수성은 외래 음악을 자주적으로 수용하는 능력과 전통음악을 창조적으로 계승해내는 한민족의 창조 역량에 의해 이뤄질 수 있었고, 이러한 능력이야말로 우리 공연예술 미의식의 근간이 된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가 1988년 설립한 한국음악사학회는 1세대 학자들이 일궈놓은 학문적 업적을 발굴하고 색인 작업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나는 반찬으로 치면 짭조름하지도 매콤하지도 않은 무덤덤한 사람. 1991년 뇌졸중으로 죽음의 고비도 넘겼지만, 그런 나를 방일영국악상이 인정해 줬으니 세상 살맛 납니다.” 수상 소식을 알릴 때 그는 여느 때처럼 집 앞 커피숍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2007년 국립중앙도서관에 책을 모두 기증해 ‘송방송문고’를 세웠지만, 음악학연구회(현 한국음악학학회) 회장 외에는 자리 욕심, 상 욕심 없기로 유명하다. 평생의 나침반은 모교 배재학당의 교훈 ‘큰 인물이 되려는 자는 사람의 정도를 걸으라’와 초등 교사였던 선친이 일러준 ‘사나이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바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 희수(喜壽)를 앞둔 학자는 “팔순이 되는 날 자서전을 내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방일영·방우영 선생이 설립한 방일영문화재단이 국악 전승과 보급에 공헌한 명인·명창에게 수여하는 국내 최고 권위의 국악상이다.1994년 첫 회 수상자인 만정 김소희 선생을 비롯해 이혜구(2회) 박동진(3회) 김천흥(4회) 성경린(5회) 오복녀(6회) 정광수(7회) 정경태(8회) 이은관(9회) 황병기(10회) 묵계월(11회) 이생강(12회) 이은주(13회) 오정숙(14회) 정철호(15회) 이보형(16회) 박송희(17회) 정재국(18회) 성우향(19회) 안숙선(20회) 이춘희(21회) 김영재(22회) 김덕수(23회)에 이어 지난해 가야금 이재숙 명인까지 최고의 국악인들이 수상했다. 자료 조선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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岐山 朴憲鳳 先生의 生涯와 國樂運動에 대한 再評價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교장 洪潤植 1960년 처음으로 문을 열게 된 국악예술학교의 설립은 이렇게 하여 그 뜻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국악예술학교의 개교는 국악이라는 이름으로 그때까지 잠자고 있던 민족혼을 불러 일으켜야만 되었고 다른 한편 예술이란 이름으로 국악의 근대적 교육방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명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21세기 오늘에 전하는 국악의 위상이 세계적 명성을 떨치게 된 데에는 기산 박헌봉 선생이 헌신적으로 노력한 국악운동의 영향이 지대하였음을 결코 우리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악인들에 이르기까지 기산 선생이 국악계에 남긴 업적을 거의 송두리째 잊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예술의 발전은 축적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에 다시 기산 선생의 생애와 국악운동이 남긴 역사적 위치에 대하여 다시 재조명해 보는 일은 늦은 감이 있으나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기산 선생은 1906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길리의 엄격한 명문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한문서숙에서 사서삼경을 수학하였고 1921년에 상경하여 중동학교, 휘문고보 등에서 신학문에 접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구학문을 겸한 기산 선생께서 세인들이 그렇게 멸시하고 천대하던 소위 광대들과 벗하여 민속음악계에 투신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 민속음악에 대한 문화의식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국악교육은 근대적 교육방법에 의하여 교육하여야 된다는 민족음악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랐다는데 기인한다. 그리고 이는 근대적 문화의식과 식민지하의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이 투철하였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라 믿어진다. 그리하여 그는 민속악 공부에 정진하기 시작하여 판소리 가사를 연구하여 와전된 부분을 바로잡아 후일 창악대강을 편찬하는 토대를 마련하였고 가야금과 창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28년에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가야금과 한시연구에 몰두하다가 좀더 국악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위하여 진주에서 진주음률연구회를 조직하여 심혈을 기울였고 이어 1936년에는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에 들어가 정악(正樂)을 연구하고 다음해에는 이왕직 아악부(李王職 雅樂部)에 들어가 아악과 풍류(風流)를 연구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축적하여온 국악에 대한 이론과 실기에 대한 문화역량을 바탕으로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입회하여 당대의 남도 명창인 이동백, 정정렬, 송만갑 등 제씨와 2년간 판소리 창법을 강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1938년에는 조선가무연구회에서 최경석, 박재춘 등과 京潟지방의 歌舞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1941년에는 조선음악협회에 산하 조선음악부를 새로 조직하고 상무이사로 있으면서 남도지방 공연을 위한 음악단과 서도지방을 위한 가무단의 두 단체를 결성하여 공연활동에 진력하게 되나 이들 공연을 통하여 민족정서를 되살리는 효과를 염려한 일제는 일어공연(日語公演)을 하게 하여 원래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여기서 민속음악인의 문화의식을 민족정기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는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기산 선생의 국악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활동은 당시의 시대상황에 부응하여 민족정기로 승화되고 있을 즈음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일제치하에서 풀려나 그 해방의 기쁨을 민족음악의 환희로 만끽하게 된다. 그리하여 동 19일에 곧바로 민족음악인의 대동단결을 목표로 국악건설본부를 함하진 등과 조직하여 오랫동안 민속음악을 천시해 온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을 깨우침으로써 민속음악을 올바른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국악운동을 전개한다. 그해 10월에는 국악건설본부를 국악원(國樂院)이라 개칭하여 초대 원장에 함하진이 취임하고 그는 부원장으로 있었으나 얼마 후 원장에 취임하여 해방을 맞이한 희망과 기대에 부푼 국악인들이 힘을 합쳐 국악중흥운동에 발분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기산 국악운동의 모태는 이제 국악을 근대적 교육방법에 의하여 교육하는 국악예술학교의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국악학교의 설립을 위한 기성회의 조직이 그것이 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국악예술학교의 모체가 된 민속음악계는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계층사상에 의하여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여 왔고 일제 식민지 차하에서는 민속음악에는 민족혼이 강하게 배어있다고 하여 탄압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한 우리 민족은 해방의 환희를 민속음악을 통하여 한껏 그 기쁨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민속음악은 질시의 대상도 아니고 탄압의 대상도 아닌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재평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뜻있는 분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리고 그것이 기산 박헌봉 선생을 중심으로 국악건설운동본부 국악학교 기성회 등을 조직하게 하는 국악의 새로운 발전을 추구하게 하는 문화운동으로 전개되어 갔다. 기산 산생의 국악계에 미친 지도력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민족예술인을 정상적인 교육기관에 수용하여 이들에게 민족예술인이란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는 사실은 국악교육의 정상화를 기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국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함으로써 국악발전의 이정표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1960년 처음으로 문을 열게 된 국악예술학교의 설립은 이렇게 하여 그 뜻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국악예술학교의 개교는 국악이라는 이름으로 그때까지 잠자고 있던 민족혼을 불러 일으켜야만 되었고 다른 한편 예술이란 이름으로 국악의 근대적 교육방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명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다른 한편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은 기산 선생이 험난한 온갖 고통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의 기층문화에서 새로운 정신세계를 발견하게 되고 그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임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산 박헌봉 선생은 언제나 그 선봉에 선 선각자였고 이에 향사 박귀희 선생, 만정 김소희 선생 등이 뜻을 같이하여 설립한 학교가 오늘의 서울국악예술학교인 것이다. 이렇게 설립한 국악예술학교에서 기산 선생은 국악교육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전국 음악교사를 대상으로 국악강습회를 개최하여야 한다는 뜻을 세워 이를 실천함으로써 획기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는 기산 선생의 지도력에 의하여 전국에 흩어져있던 국악의 명인들을 제도적인 교육기관에서 수용하여 효과적인 교육을 하게 함으로써 가능하였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기산 산생의 국악계에 미친 지도력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민족예술인을 정상적인 교육기관에 수용하여 이들에게 민족예술인이란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는 사실은 국악교육의 정상화를 기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을뿐 아니라 국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함으로써 국악발전의 이정표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때까지의 국악교육기관으로는 국립국악원 국악사 양성소가 있었으나 이는 역사적으로는 제도적 비호를 받아오던 궁중음악 중심의 교육기관이었다면 국악예술학교는 기층문화의 전통을 이어온 민속음악중심의 교육기관이었다. 그리하여 국악예술학교 개교와 더불어 국악교육의 폭은 확대되어 갔고 이로써 전통음악교육의 의의는 다시금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기산 선생은 한편으로는 우리 전통예술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인멸되어가던 이 분야의 자료와 인적 자원을 계속 발굴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국악예술학교는 무형문화재의 산실같은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고 그러기에 오늘의 무형문화재 전수의 기능이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상에서 보면 기산 선생은 일제시대에는 민족정신의 고양으로 국악을 지켜왔고 광복 이후에는 민족음악에 대한 전근대적 인식을 탈피하여 국악의 정체성을 민속음악 중심으로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어 이와 같은 국악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여 국악교육의 정상화를 기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전국에 흩어져 인멸되어 가고 있던 민속예술을 발굴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게 함으로써 국악예술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게 한 공적은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오늘의 우리는 기산 선생의 이와 같은 업적을 재평가하여 그 역사적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일을 해 나가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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